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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여행지

석굴암

국보 제24호인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석굴암의 구조는 방형과 원형, 직선과 곡선, 평면과 구면이 조화를 이루며 특히 벽 주위에 조각된 38체는 어느 것 하나 걸작이 아닌 것이 없고 전체적인 조화를 통해 고도의 철학 성과 과학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으며 중앙에는 백색 화강암으로 된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여래좌 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문무왕 수중 왕릉인 봉길리 앞 대왕암을 향한다.

불국사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 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핵심으로 신라 경덕왕 (742-764) 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운곡서원

조선 후기, 정조 시기에 지은 교육 시설. 본래 고려의 공신이자 안동 권씨의 시조인'권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절이었으나, 서원으로 바꿔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4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으며, 가을이 되면 눈처럼 내리는 노란 은행잎과 함께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서원 안쪽에 전통찻집 '운곡'이 있어 휴식을 취하며 편안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도 좋다.

황리단길

황리단길은 경주에서 가장 젊은 길이다. 내남사거리에서 시작해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의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의 황남동, 사정동 일대의 지역을 일컫는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분위기 좋은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 기념품 가게, 개성 있는 식당들이 들어섰다. 초기에는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점들이 들어섰는데 황리단길 외연이 확장되면서 골목골목마다 개성있는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강

양동민속마을

경주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 손 씨 입향조인 양만 공 손소(襄敏公 孫昭, 1433∼1484)가 조선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으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관(地官)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손소희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인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종가 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